본 내용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비개별적 정보 제공이며, 투자 권유·자문이 아닙니다.

FINANCIAL

법인 자산배분에서 현금이 하는 일

현금에 대한 통념은 명확하다. 인플레이션에 녹고, 다른 자산이 오르는 동안 아무것도 벌지 못한다. 이 통념은 절반만 맞다. 현금이 비용을 치르는 자산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절반에서 멈추면 잘못된 결론에 도달한다. 물어야 할 질문은 "현금이 얼마를 잃는가"가 아니라 "그 비용을 치르고 우리가 무엇을 사는가"다.

우리는 현금이 법인 자산배분 안에서 세 가지 일을 한다고 본다.

현금은 옵션이다

좋은 자산이 좋은 가격에 나오는 순간은 예고 없이 온다. 시장이 흔들리고, 매도자가 급해지고, 평소라면 성립하지 않을 조건이 성립하는 짧은 구간. 이 구간의 특징은 그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투자자는 이미 가득 투자되어 있고, 흔들리는 시장에서 새로 자금을 조달하기는 가장 어렵다.

현금은 이 순간에만 행사할 수 있는 매수 권리다. 권리에는 값이 있고, 현금의 낮은 수익률은 그 권리를 유지하는 보험료다. 보험료만 보면 아까워 보이지만, 옵션 없이 기회의 구간을 지나는 투자자는 참여자가 아니라 관찰자가 된다.

현금은 완충이다

대출을 안고 실물자산을 보유한 법인에게 현금의 두 번째 역할은 더 절실하다. 이자, 세금, 수선비, 공실. 자산이 벌어들이는 현금흐름이 잠시 끊겨도 지급 의무는 끊기지 않는다. 이 간격을 메우는 것이 현금이고, 이 방어선이 무너질 때 일어나는 일이 강제 매도다.

최악의 손실은 가격이 하락하는 것이 아니다. 하락한 가격에 팔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가격 하락은 시간이 복구할 수 있지만, 강제 매도는 손실을 확정하고 시간의 편에 설 기회 자체를 없앤다. 충분한 현금 완충은 "팔지 않을 자유"의 값이며, 장기 보유 전략은 이 자유 위에서만 성립한다.

현금은 규율이다

세 번째 역할은 덜 알려져 있다. 현금 비중의 하한을 미리 정해두면, 자산 가격이 오를수록 매수 여력이 자동으로 조여진다. 시장이 뜨거울수록 덜 사게 되고, 시장이 식어 자산 비중이 줄면 살 수 있는 여력이 자동으로 열린다.

이것은 시장을 예측해서 얻는 결과가 아니다. 규칙을 지켜서 얻는 구조적 결과다. 절제를 매 순간의 의지에 맡기면 시장의 온도에 함께 달아오르지만, 구조에 맡기면 온도와 무관하게 작동한다. 우리가 예측보다 규율을 신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인의 현금은 개인의 현금과 다르다

법인의 현금에는 캘린더가 붙어 있다. 부가세와 법인세의 납부 일정, 대출 이자의 지급일, 고정비의 주기. 개인의 "여유 자금"과 달리 법인의 현금은 상당 부분이 이미 주인이 정해진 돈이다.

그래서 법인의 현금 관리는 총액이 아니라 층위로 봐야 한다. 언제든 지급 가능해야 하는 즉시성 자금, 수개월 안에 나갈 것이 확정된 예정 지급분, 그리고 이 둘을 제외하고 남는 진짜 대기 자금. 옵션과 규율의 역할을 하는 것은 마지막 층위뿐이다. 이 구분 없이 통장 잔액 전체를 "투자 가능한 현금"으로 읽는 것이 법인 자금 운용에서 가장 흔한 착시다.

현금 비중은 정책이다

"지금 현금을 얼마나 들고 있어야 하는가"는 시황 질문이다. 답이 계속 바뀌고, 바뀔 때마다 판단이 필요하며, 판단에는 그날의 감정이 스며든다.

"우리는 어떤 하한을 지킬 것인가"는 정책 질문이다. 한 번 숙고해서 문서에 적을 수 있고, 시장이 흔들리는 날에는 판단하는 대신 읽으면 된다. 원칙은 시장이 흔들릴 때를 위해 미리 적어 두는 문서라는 우리의 문장은, 자산배분에서는 정확히 현금 비중의 하한으로 구현된다.

더블록스가 금융자산 편입에 앞서 내부 투자정책서를 먼저 세우는 이유도 같다. 무엇을 살지 정하는 것은 그다음 일이다. 흔들리는 날에 무엇을 읽을지부터 정하는 것이 순서다.